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
손병희: 천도교 측 수장. 1922년 사망. 딸 다섯 중 셋째 딸 손용화는 소파 방정환의 아내. 이승훈: 개신교 측 수장이자 교육자. 1906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음. 1930년 작고. 33인 중 가장 늦게 풀려남. 한용운: 불교 대표. 공약 삼장 작성. 말년에는 중풍에 시달리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사망. 권동진: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(?) 천도교 입문. 3.1 운동 후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 참여. 증손 권혁방은 33인 유족회 회장 재임. 권병덕: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, 천도교 입문. 3.1 운동 후 천도교 감사원장, 선도사 등을 역임. 1943년 타계. 길선주: 한국 최초의 목사. 3.1 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.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.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었으나 2009년 건국훈장 수여.[5] 김병조: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. 상해에서 임시정부 상임이사,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. 독립혈사 간행. 북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 되다가 1990년 3.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. 김완규: 경술국치 후 천도교 입문. 3.1 운동 후 도사직을 맡고, 민중 계몽운동 전개. 1949년 타계. 김창준: 개신교 측 대표. 함경북도 만세 운동 주도. 광복 후 공산주의 개신교 운동 전개.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. 독립유공자에서 제외. 북한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6.25 전쟁은 대한민국이 북침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왜곡을 주장하는 활동을 하였다. 나용환: 23세 때 동학 입문. 3.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. 1936년 병사. 나인협: 19세 때 동학 입문. 3.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. 1951년 병사. 박동완: 개신교 측으로 3.1 운동 경기 지방의 시위 주도. 신간회 상임이사. 1923년 하와이로 망명. 1941년 병사. 백용성: 불교 대표. 법명은 용성진종대사.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 주도.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. 대각사 창건 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. 일제의 감시를 피해 틈틈이 상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했으며, 윤봉길을 불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 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.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, 실의 속에 1940년 입적. 박준승: 29세 때 천도교 입문. 3.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. 1927년 병사. 신석구: 개신교 대표. 3.1 운동 후 1938년 신사 참배 거부.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. 1949년 감리회 북한 지역 총책임자로 개신교 민주당 결성. 같은 해 진남포 4.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1950년에 처형. 신홍식: 개신교 대표.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.1 운동 참가.[6] 신사 참배 거부. 1939년 사망. 양전백: 평양 신학교 졸업. 목사로 있다 3.1 운동 참여. 목회 사업에 전념. 105인 사건에 연루. 양한묵: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.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. 1919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. 오세창: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. 한성순보 기자. 만세보, 대한민보 등의 사장. 해방후 매일신보, 서울신문 사장. 1953년 사망. 오화영: 감리회 목사. 6.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.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. 1989년 3.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. 19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. 유여대: 목사로 3.1 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오후 늦게 서울 도착. 일경에 붙들렸다. 1937년 사망. 이갑성: 개신교 신자.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. 3.1 운동, 민립대학 설립운동, 신간회 운동,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, 변절했다는 주장, 이에 더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. 2005년 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 취재한 결과 1930년대까지는 오히려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으며,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언급했다가 정정 기사를 냈다.# 매일신문은 역사 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'희생자'였다고 평했다.# 그러나 40년대까지 변절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는 상태.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로, 광복을 넘어 5공 시절인 1981년에 서거하였다. 이명룡: 개신교 대표. 105인 사건 연루. 3.1 운동 후 물산장려운동 참가, 언론 활동. 1956년 병사. 이종일: 천도교 대표.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. 1925년 작고. 이종훈: 천도교 대표. 1931년 만주에서 병사. 이필주: YMCA 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음. 1942년 작고. 임예환: 동학혁명에 동참, 3.1 운동에 가담.[7] 최성모: 감리회 목사. 이필주를 만나 3.1 운동에 가담. 황해도 시위 주도. 홍기조: 홍경래의 직계후손[8] 22세 때 천도교 입문,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. 3.1 운동 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. 1938년 병사. 홍병기: 천도교 대표. 고려혁명위원회 조직.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. 1949년 작고.